수액터스팜 선배들이 남긴 생생한 합격후기로 그 경험을 나누고 성공의 다짐을 합니다.
등록일 2017.09.29/조회수 1467
06년 용인대학교 연극학과 합격 / 수팜4기 강민순(부산만덕고 졸)
나는 무척이나 행운아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행운아의 주위엔 너무나 좋은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아서 눈물 날 만큼 행복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우리 가족.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고 수액터스팜이라는 공간을 소개시켜주신 김용우 스승님.
배우로서 신체표현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던 김수진 스승님과 최미령 스승님.
노래는 신체의 어느 기관도 아닌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박선주 스승님.
온화함 속의 강함을 보여주셨고 항상 아기 찬규에게 쏟을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쁘셨던 어머니 같은 김윤희 스승님.
거칠고 모난 돌맹이 강민순을 다듬고 깍아 어엿한 대학생으로 만들어주시고 배우로서 삶의 지표를 보여주신 이정용 스승님.
훌륭하신 스승님과 우리 연습실 식구들 사이에서 이 행운아는 엄청난 기적을 일궈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가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결정을 쉽게 내린다.
재수도 그러했고 서울로 올라오는 것도 그러했다.
그리고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있었던 수액터스팜이라는 연습실을 택함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쉽게 내리는 선택이 위험하기도 했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Best Choice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습실을 다니면서 다른 건 몰라도 가장 잘 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번도 스승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의심을 하거나 의문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연기란 그리고 연극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작업이고 믿음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힘이 들었을 때는 스승님께 있어서 나라는 존재가 그저 부산에서 올라온, 대학을 보내기 힘이 드는 아이, 만약 내가 연습실을 그만둔다고 하면 앓던 이가 뽑힌 기분이 들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을 때였다.
어쩌면 그 것도 스승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 부족했던 것일까?
그 것을 이겨내기까지가 시간이 조금 걸렸고 아닌 척 했지만 무척이나 가슴앓이를 했었다.
우리 연습실의 장점이라 하면 물론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는 입시연기를 해야 하지만 그것이 있기 이전의 배우훈련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연기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즐기면서 배우의 골격과 틀을 갖춰가는 재밌는 수업.
그 수업들이 그리운 것은 아직도 내가 배움이 부족하고 배우고 싶기 때문이겠지.
연습실엔 여러 가지 대소사도 함께 있었다.
아기 찬규의 탄생, 선생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나의 교통사고, 갑자기 진행된 연습실 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작지만 큰 공연이었던 『 16명의 여름변주곡 - 5개의 단막극이 하나 되다 』
처음 공연을 하기 전엔 그저 재밌기만 했었던 우리들이 공연이 끝나고 성장한 모습을 다들 기억할까?
물론 연습을 할 때도 극장에서 공연을 끝냈을 당시에도 몰랐다.
서로가 실력이 늘어가는 것과 연기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는 것을.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번 독백을 하는 것보다 하나의 극을 올리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체훈련, 독서, 수업일지, 특기준비 그리고 공연관람은 틈틈히 그리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입시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 전에도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지적이 기억난다.
나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 내 할 일은 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 그렇기 때문에 스승님이 지적을 하신 것이다.
게으름은 입시생은 물론이고 배우에게 있어 최대의 적이다.
자기 자신 하나 다루지 못하면서 수십 명 수백 명의 관객을 다루기란 절대 무리가 아니겠는가.
연습실 식구들이 늘어가며 초반의 아늑하고 항상 알찼다고 생각하던 수업들이,
이제는 스스로가 나서지 않으면 챙겨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을 때는 모두 경쟁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스승님께서 내리신 특단의 조치였다.
그 결과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들은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또 격려와 응원을 하며 함께 발전 할 수 있었다.
인원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반을 2개로 나누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고 스승님들께서도 늦은 새벽까지 우리의 연습을 도와주시고 아예 정규수업에 새벽의 레슨이 포함 되버리는 현상은 스승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생각하시는가를 알 수 있었고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그 전에 잘 해 뒀으면 스승님을 그렇게 피곤하게 만들 일을 없었을텐데.
스승님께서는 그 새벽의 수업들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좋은 새벽의 수업에서도 각자 얻어가는 것을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스승님께서 많이 퍼주려고 하셔도 그릇의 모양과 크기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가져가는 양도 달랐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큰 그릇으로 수업에 임하였었는지...
어느새 '언제 가는 오겠지'하고 생각하던 원서접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금세 들이닥친 것 같았지만 그 전에 1년이라는 시간은 계속 나에게 경고를 하며 흘러지나왔다.
지금까지의 수업들, 수십 번의 오디션과 스승님과의 상담들이 바탕이 되어서 우리들과 마지막 원서접수 상담을 하였다.
상담은 누구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위치와 스승님께서 해주셨던 말씀도 있기에 마음의 준비와 원서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원서를 다 쓰고 둥그렇게 모여서 각자의 얘기를 나눌 때 내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우라는 말이 있는데 스승님과의 입시상담을 하기 위해 교무실에 들어가니깐 내가 누울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스승님과 상담 끝에 경희대, 용인대, 청주대, 서울예대라는 네 군데, 너무 좋지만 구하기 힘든 묘 자리를 봐 놓았다고, 하지만 아직 묘 자리만 본 것이지 확정된 것이 아니기에 내가 그 자리에 누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꼭 거기에 누워서 비석에 06학번 강민순이라고 쓰고 또 나가서는 그 비석에 배우 강민순이라고 적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말...
칭찬을 받아서 그런 가 기억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지키기 위해서는 잊지도 못하고 잊을 수도 없다.
앞선 중앙대와 서울예대 수시를 낙방하고 올 해들어서 보는 3번째 시험이자 정시로선 처음인 가군 경희대학교 시험.
가 번호가 2번이 되어서 놀라기도 했지만 최대한의 자신감과 최소한의 자만심으로 평소의 연습한 결과를 뽑아내기 위해서 마음을 추스렸다.
노래를 포함한 종합연기와 즉흥대사, 즉흥상황 그리고 인터뷰까지 모두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정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다는 마음과 여지껏 질문다운 질문을 받은 적이 없던 나로서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 기뻤고 더불어 합격을 하건 못하건 이 느낌을 유지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군까지 조금 느슨해진 것이 사실이다, 태만해지는가 하면 가군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합격이라고 생각하고 연습을 게을리 했다.
그러던 나에게 닥친 것은 즉흥대사의 자신감 상실이었다.
그 전까진 특별히 지적을 받은 것이 없고 또 나 스스로도 딱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도 않았지만 지적을 받고나니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솔직히 시험당일까지 가지고 있었다.
용인대는 정말 붙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려 질의응답의 비중을 엄청나게 두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퍼포먼스, 요즘 대학로 연극의 추세 등등... 시사적이면서 전문적인 것들을 정말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용인대 시험 당일 정말 경희대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흥대사를 받았는데 보이첵이었다.
물론 그 당시엔 나는 몰랐고 그냥 좋은 소리와 띄어 읽기, 발음에 유의하면서 연습을 하고 블러킹도 조금씩 짜기 시작했다.
아예 외워서 볼까 하고 외웠지만 긴장감에 까먹기가 일쑤였다.
호흡을 유지하며 대본을 훔쳐보는 것, 이 것이 즉흥대사를 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즉흥대사는 다 했다, 하지만 특기를 하는 도중에 나 스스로도 이건 조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교수님이 끊어버리셨다.
속으론 '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에 비춰지지 않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질문을 받기위해 중앙에 섰다. 질문을 2가지 하셨지만 내가 준비했던 질문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합격 질문이다 라고 생각할 만큼 크게 와 닿는 질문도 없었다.
이 것에 약간 기가 꺾였지만 더 좋은 자극제가 되어 부지런히 연습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주대와 서울예대의 실기 시험날짜가 겹친 것이었다.
두 곳의 시험 사이엔 2시간의 여유가 있지만 그 것은 내가 청주대 가 번호 추첨에서 앞 번호를 받았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여기저기 수소문과 하소연을 해보아도 확실한 답은 없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청주대만 붙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냐고 물으셨고 나는 거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청주대 실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예대는 기억에 지워두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다.
청주대 시험이 끝나면 스승님께서 차를 몰아 나를 싣고 예대까지 달려보겠다고 하셨다.
어느 곳 하나 쉽게 포기하고 쉽게 선택 할 수 없는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것 밖에는 최선의 방법이 없었다.
청주대는 내가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출공부를 했었고 예대는 입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움직임을 특기로 보여줄 수 있는 대학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스승님의 그런 노고에도 불구하고 둘 다 떨어져버렸지만 말이다.
발표는 잔인하고 또 확실하게 났다.
명확히 이해가 되는 결과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서는 의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느낀 것은 붙는 친구들은 줄줄이 붙는 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력도 운도 어느 것도 아닌 고사장 안에서 자신들이 운영해나간 오디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실력도 실력이고 외모도 외모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뽑는 것이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기 마련이다.
진심으로 다가가면 진심으로 통할 수 있다.
입시철동안 그 것을 느꼈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고 간사한 동물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대학이란 목표가 우리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해주었고 만남으로 엮어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 고마움을 뒤로 한 체 각자의 학교들로 헤어지게 만든다고 원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곳이든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자신이 원치 않는 곳으로 가기 때문에 합리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엔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런 말만 한다면 정말 쓰레기인 것이다.
나는 위의 말처럼 어느 곳이든 가서 열심히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원서를 결정할 때에 내가 쓰던 대학들 모두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이기 때문이고 막연하고 무작정 가고 싶던 대학들에 이유가 생기고 애정이 쌓이면서 어디든 갈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수액터스팜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 용인대학교라는 큰 강으로 나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길 사건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경험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배우라는 큰 대양을 목표로 하는 나에겐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리고 수액터스파머인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정용 스승님과 김윤희 스승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보단 최고를 그리고 열심히 보단 잘 할 것이다.
나는 자신있다. 왜?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